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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산국악원, 우리 춤과 음악으로 그려낸 '조선통신사'국립부산국악원(국악원)은 다음 달 2일부터 11일까지 한류 확산 국악 공연 시즌Ⅲ '춤, 조선통신사_유마도를 그리다'를 개최한다고 28일 밝혔다.이번 공연은 국악원이 2015년부터 부산을 방문하는 국내외 관광객, 시민들을 선보인 한류 확산 국악 공연 '왕비의 잔치(2015~2017)', '천생연분(2018~2019)'에 이어 마련됐다. 이번 무용극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그려낸 소설 '유마도'를 모티브로 통신사 사행길에 오른 무명 화가 변박이 그린 그림 '유마도'의 비밀을 파헤치는 작품이다.이는 소설 속 조선통신사를 재조명하며 400년전 통신사들이 건넜던 망망대해와 그 여정을 한국의 춤, 음악으로 표현한 수작으로도 꼽힌다.이번 무대는 국악원 무용단의 수려한 몸짓과 기악단의 연주, 화려한 조명과 영상을 통해 다채롭게 표현될 예정이다. 공연은 다음 달 2일부터 11일까지 총 7차례 펼쳐진다. 일·월·화·수요일을 제외한 평일 오후 7시 30분, 주말 오후 3시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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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극 '춤, 조선통신사_유마도를 그리다'국립부산국악원(원장 이정엽)은 5월 2일(수)부터 11일(토)까지 2주간 한류확산 국악공연 시즌Ⅲ <춤, 조선통신사_유마도를 그리다>를 개최한다. 국립부산국악원은 2015년부터 부산을 방문하는 국내·외 관광객 및 시민을 대상으로 관광공연콘텐츠를 개발하여 국악의 한류화에 앞장서왔다. 부산의 대표 관광공연콘텐츠인 ‘왕비의 잔치(2015~2017)’, ‘천생연분(2018~2019)’에 이어 ‘춤, 조선통신사_유마도를 그리다(2023~2024)’로 이어지는 한류확산 국악공연을 선보인다. 이번 공연은 부산의 역사 문화 자산이자 평화의 상징으로써 부산에서 매년 개최하는 조선통신사 축제 기간(5월 첫째 주)에 진행하며, 오늘날 대립과 갈등을 넘어 예술로 교류하고 평화를 모색하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무용극 <춤, 조선통신사_유마도를 그리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그려낸 소설 「유마도(원작 강남주)」를 모티브로 통신사 사행길에 오른 무명 화가 변박이 그린 그림 ‘유마도’의 비밀을 파헤치는 작품이다. 2019년 춤과 음악, 무대의 완벽한 조화로 극찬 받은 초연 이후, 2023년 더 세밀하고 탄탄하게 재구성하여 전석 매진과 기립박수의 뜨거운 호응을 받아, 2024년 다시 새롭게 매만지고 다듬은 깊이와 웅장함으로 관객들을 만나고자 한다. 소설 속 조선통신사를 재조명하여 400년전 통신사들이 건넜던 망망대해와 여정을 한국의 춤과 음악으로 표현한 수작이다. 이번 공연은 무용극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의 수려한 몸짓과 어우러지는 국립부산국악원 기악단의 격조 높은 연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평화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국서(國書)를 전달하기 위한 조선통신사들의 긴 여정을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그려냈다. 춤과 음악의 깊이에 화려한 조명과 영상이 더해지고 색과 질감이 돋보이는 무대로 관객이 보다 쉽게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주요 장면의 안무, 음악, 영상 등을 새롭게 구성했다. 특히, 해신제와 문화사절단 행렬 재현에 지역 예술인(연극인)들과의 동행으로 교류와 확장, 나아가 대중성에 한 걸음 더 다가서고자 한다. 특히, 무대를 가득 채운 LED배경막의 시각적 요소를 활용하여 생동감 있는 무대를 통해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묘미를 느낄 수 있다. 통신사 일행이 탄 배 ‘사행선’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무대미술은 안전성을 확보하여 새롭게 무대디자인 하였으며, 회전무대에 따른 다각도 장면묘사와 80여명의 총 출연진이 펼치는 공간감과 깊이감 있는 무대 연출로 공연의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 이번 공연은 5월 2일(수)부터 11일(토)까지 총 7회의 공연을 개최한다. 일, 월, 화, 수요일을 제외한 평일 오후 7시 30분, 주말 오후 3시에 운영한다. 사전예매는 국립부산국악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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眀嘉 강선영 탄생 100주년 ‘불멸의 춤’ 되새긴다명가 강선영선생(1925~2016) 춤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무대가 제자들에 의해 준비되었다. 오는 14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근대 춤의 시조 한성준 선생 작품 신선무, 훈령무, 한량무, 검무, 강선영 춤 인생의 정수를 보여줄 태평무까지 펼처진다. 타고난 안무가적 기질로 많은 무용극을 창작해왔고 그의 대명사로 지칭되는 태평무는 '몸과 마음이 일치된 예술 춤'이라는 찬사와 함께 ‘한국 명무’의 반열에 올랐다. 1998년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전승과 보존을 꾀하고, 재능 있는 춤꾼들의 발굴 양성과 개방화된 무대를 제공하기 위해 태평무 전수관을 건립하였다. 이번 무대는 제자들의 출연과 태평무 음악 이수자인 김덕수(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명예교수) 선생이 음악감독을 맡았다. 조흥동(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강선영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장), 양성옥(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보유자), 김근희(경기문화재 제53호 경기검무 보유자) 등의 무용계 중추인 중진·중견 무용가들이 함께하는 큰 춤판이다. 선생의 유언(?)을 떠 올리는 무대가 기대 된다. "나는 옛날부터 예술가들이 무대에서 춤추다가 죽고 싶다는 말을 가장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만약 무대가 아니더라도 내 기력이 쇠약하여 기진할 때까지 나는 항상 현장에 서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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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 '제6회 판놀음 별별창극' 전통예술 단체 모집국립민속국악원(원장 김중현)은 12일(금)부터 17일(수) 18:00까지 6일간, '제6회 판놀음 별별창극'와 함께 할 공연 작품을 보유한 전통 예술 단체를 모집한다. 이번 공모에서는 창극, 소리극, 음악극, 창작극, 무용극, 연희극, 어린이극 등 다양한 예술 분야의 작품을 선정할 예정이며, 공연 시간은 60~90분 내외로 지정되어 있다. 최종 선정 작품은 4개 내외로 공연 일정은 5월 25일(토), 5월 29일(수),6월 1일(토), 6월 8일(토)로 예정되어 있으며, 국민민속국악원 예원당(560 석)과 예음헌(88석)에서 공연된다. 심사는 22일(월)부터 26일(금)까지이며, 결과발표는 2월 1일(목)에 국립민속국악원 누리집 및 개별 통보를 통해 이루어질 예정이다. 자세한 사항은 국립민속국악원 누리집(https://namwon.gugak.go.kr)에서 확인 가능하며, 문의 사항은 전화(063-620-2323)를 통해 안내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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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지역 송년합동공연 “남도풍류”국립남도국악원과 전라남도립국악단, 진도군립민속예술단이 공동주최하는 송년합동공연 "남도풍류”가 오는 12월 (전남 진도) 진악당 14일 무대에 오른다. 송년합동공연 "남도풍류”는 남도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3개 국·공립 예술기관(국립남도국악원·전라남도립국악단·진도군립민속예술단)이 2012년부터 상호교류를 목적으로 순회 개최하고 있는 공연이며, 각 기관마다 특색 있는 작품을 구성하여 지역민과 함께 하고 있는 뜻깊은 공연이다. 전라남도립국악단은 1986년 8월 9일 창단하여 창악·무용·기악·사물 등 140 여명의 단원들이 류형선 예술감독을 중심으로 우리 음악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진도군립민속예술단은 진도 고유의 전통 민속 예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1993년 9월 예술단을 창단하였고, 현재는 김경호 예술감독을 중심으로 진도의 우수한 문화를 알리고자 많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순회로 개최하고 있는 합동공연은 올해는 국립남도국악원이 위치한 전남 진도에서 개최되며 3개 단체가 다양하고 품격 있는 공연을 준비하였다. 국립남도국악원이 두 작품, 전라남도립국악단이 두 작품, 진도군립민속예술단이 한 작품을, 그리고 공동 구성한 두 개 작품 등 총 일곱 개 작품으로 구성된다. 먼저, 국립남도국악원은 <남도한량무>와 <만파정신지곡>을 선보일 예정이며, 전라남도립국악단은 <컨템포러리 아쟁산조>와 무용극<봄날>을 선보인다. 또한, 진도군립민속예술단은 창작 작품 <천궁>으로 관객들에게 진도 민속 예술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3개 단체가 공동으로 준비한 합동 <풍물놀이>와 <아리랑 연곡>은 각 연주단별 특색을 엿볼 수 있음은 물론, 전통예술가들이 한 무대에서 어우러지는 화합의 장을 관객들이 경험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 될 예정이다. 특별이벤트로 연말을 맞이하여 관람객들에게 국립남도국악원이 제작한 2024년도 캘린더를 선물한다. 공연은 무료이며 공연 전후 진도 읍내와 국악원을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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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산국악원, 어린이 국악극, '제비씨의 크리스마스'등등국립부산국악원은 12월 한 해를 마무리하며 온 가족이 모두 함께즐길 수 있는 어린이 국악극 시리즈 <동화나라 별별친구>를 개최한다. 12월 매주금요일 오후 7시 30분, 토요일 오전 11시, 오후 3시에 다채로운 동화 속 친구들이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와 함께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보자. 1~2일 이비컴퍼니 <나무의 아이> <나무의 아이>는 ”2019-20 ACC 아시아 스토리 어린이 콘텐츠 제작 사업"으로제작되었다. ‘목도령과 대홍수’라는 우리나라 홍수 설화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새롭게 해석한 작품으로, 남과 다른 아빠를 가진 아이가 세상을 이해하고 배우게 되는 이야기이다. 단순하고 쉬운 언어와 국악기의 라이브 연주에 움직임을 더하여 아이들의 상상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세상에서 버림받은 붙박이 나무아빠와 외톨이 나무도령이 새로운 세상을 찾아 항해를 떠나는 첫 여행기를 그려냈다. 8~9일 국립민속국악원 <강강숲에 떨어진 달님> <강강숲에 떨어진 달님>은 국립민속국악원 무용단과 창극단 단원들이 직접 작품을 공동구성·안무한 작품이다. 2022년 초연 이후 국립국악원, 전주세계소리축제 등에 초청되어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작품은 ‘강강술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이야기를 더해 제작한 어린이 무용극으로 강강술래, 남생이놀이, 고사리 꺾기, 청어엮기, 청어풀기, 꼬리잡기, 대문놀이 등 어린이들이 즐기는 놀이를 통해 우리 춤과 음악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는 작품이다. 달님이 별님들과 숨바꼭질을 하다 발을 헛디뎌 강강숲에 떨어져 혼자 있을 때 달토끼를 만나 남생이, 꿩, 다람쥐, 호랑이, 반달곰과 함께 강강술래를 돌려 다시 하늘로 올라가 밤하늘을 밝게 비춰준다는내용을 담았다. 15~16일 창작집단 깍두기 <신나는 빨강모자와 친구들> <신나는 빨강모자와 친구들>은 엄마의 심부름으로 애완견 마스와 할머니 집으로 떠나는 빨강 모자의 여정을 담은 작품으로 관객과 함께 만들어 가는 공연이다.관객과의 활발한 소통을 통해 공연에 대한 집중도를 높였으며 시각적으로는 마술, 버나, 그림자극 등 각종 퍼포먼스를 녹여내었다.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소통과 교감을 끌어내어 그 안에 ‘권선징악’의 메시지까지 담아 어린 관객들에게 교훈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하였다. 22~23일 두근두근시어터 <할머니의 이야기치마> <할머니의 이야기치마>는 헌 옷과 헝겊 누더기로 만든 제주의 오름과 한라산, 바다 속 풍경을 배경으로 환경과 자연에 대한 고민을 관객과 함께 나누는 인형극이다. 아시테지국제여름축제, 춘천인형극제, 국립국악원 토요국악동화, 방방곡곡 문화공감, 명주인형극제 등 굵직굵직한 무대에 선보이며 많은 사랑과 더불어 그 완성도를인정받았다. 제주 신화와 자연에서 차용한 등장인물, 독특한 무대 장치와 오브제운용, 온 가족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 의식과 조화로운 구성 등을 보여준다. 제주색이 짙은 작품의 특성에 맞춰 서우젯소리, 이어도사나, 느영나영 등 제주민요도 편곡해 선보인다. 가야금, 생황 등의 여러 국악기를 활용하며 전통음악과 현장 연주의 매력을 선사한다. 29~30일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제비씨의 크리스마스> <제비씨의 크리스마스>는 전통 판소리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2019년 서울어린이연극상에서 대상, 남자배우상, 최고인기상을 수상하였다.‘제비노정기’는 다리가 부러진 제비가 흥보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강남에 갔다가 은혜를 갚기 위해 선물을 가지고 돌아오는 여정을 주제로 한 판소리의 대목이다. 판소리가 가진 장점을 살려 공연 중 추임새를 넣고 동물 소리를 따라할 수 있는시간을 마련하여 어린이 관객들이 판소리 공연을 즐기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교육적인 내용도 담았다. 신나는 춤과 노래, 그리고 제비의 모험을 통해성장하는 이야기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양한 국악기의 라이브 연주가 더해져 올 연말 온 가족이 함께 따뜻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특별한 무대를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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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오페라하우스, 오페라 본고장 이탈리아 진출대구오페라하우스(관장 정갑균)가 자체 제작 오페라 ‘투란도트’로 세계 오페라의 중심지 이탈리아에 진출한다. 2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이탈리아 페라라시립극장 무대에, 게다가 극장의 2023/24 시즌 첫 작품으로 오르게 된 것이다. 일반적인 국내 예술단체의 해외 공연이 공연장을 빌리는 대관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고려하면, 유럽 극장에서 시즌 참가작으로 공식 초청 및 공연료를 전액 지원받아 공연하게 된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성과다. 대구오페라하우스의 이번 페라라시립극장 진출은 2021년 두 극장 간 공연교류 협약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 2022년 대구오페라하우스가 대구국제오페라축제 메인오페라로 페라라시립극장이 제작한 ‘돈 조반니’를 초청 및 합작하며 시작됐다. 이번 투란도트 공연도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제작한 무대와 의상, 직접 캐스팅한 주·조역들이 이탈리아에 그대로 진출하는 형태로 진행됐으며 현지 합창단·오케스트라가 참여해 함께 공연을 꾸미게 된다.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자체 제작한 오페라로 이탈리아 극장의 공식 시즌 작품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2015년 살레르노 베르디극장에 진출한 ‘세비야의 이발사’ 이후 8년 만이다. 대구오페라하우스는 이번 투란도트 공연을 위해 최고의 출연진과 제작진들로 팀을 구성했다. 오페라·창작극·콘서트·무용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기민정이 연출,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청교도’, ‘토스카’, ‘나비부인’ 등 오페라들을 지휘하며 뛰어난 음악성을 입증한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 마르첼로 모타델리가 지휘를 맡았다. 또 투란도트 역에 소프라노 릴라 리, 칼라프 역에 테너 윤병길 등 국내외 오페라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들이 대거 참여해 한국 오페라의 위상을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공연은 11월 24일(금) 저녁 8시, 26일(일) 오후 5시에 이뤄지며, 현재 절찬리에 예매되고 있다. 대구오페라하우스 정갑균 관장은 "오페라의 발원지이자 심장부인 이탈리아 무대에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제작한 오페라를 공연하게 된 것은 한국 오페라의 수준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라며 "이번 이탈리아 공연에 이어 루마니아, 에스토니아, 독일 만하임 등 잇따른 유럽 무대 진출로 대구산(産) 오페라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페라라시립극장의 마르첼로 콜비노(Marcello Corvino) 예술감독은 대구오페라하우스의 투란도트를 극장의 2023/24 시즌 첫 작품으로 올린 이유에 대해 "첫 번째는 투란도트가 동양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오페라 역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장대한 작품 중 하나인 투란도트를 대구오페라하우스가 가진 높은 테크닉과 예술적 수준으로 훌륭하게 표현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구오페라하우스는 이번 이탈리아 페라라시립극장에서 공연하는 투란도트에 이어 2024년에는 루마니아 부큐레슈티국립극장, 2025년에는 에스토니아 사아레마 오페라페스티벌, 2026년에는 독일 만하임국립오페라극장 등 유럽 극장으로 진출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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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남도국악, 서울경기춤연구회 '명가월륜', 초청공연국립남도국악원은 오는 11월 11일 토요일 오후 3시, 대극장 진악당(전남 진도)에서 서울경기춤연구회 "명가월륜” 초청공연을 개최한다. 서울경기춤연구회는 서울·경기권에서 파생·발전된 전통춤을 계승하기 위해 결성된 예술 단체로,현재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목을 찾아 연구하고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한다. 젊은 예술가들에게 전통춤을 전승하고 가치를 전달하여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게 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진 단체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은 "명가월륜”이라는 제목으로 서울·경기권을 기점으로 전통춤의 선구자로 불리는 한성준(1874~1942) 선생의 뒤를 잇는 명가(明嘉) 강선영(1925~2016) 선생과 월륜(月輪) 조흥동(1941~현재)의 계보를 통해 기억해야 할 우리 춤을 선사한다. ‘수없는 연습으로 세포마다 춤이 아로새겨져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춤’으로 강선영이 회상한 <승무>를 시작으로,특정한 음악이나 양식에 구애받지 않는 <즉흥무>, 일명 ‘선비춤’이나 ‘신선춤’이라 불리는 <한량무>,경기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기검무>를 적벽가와 함께 선보이며, 경기도당굿 터벌림 장단에 맞춰 꽹과리를 들고 추는 <진쇠춤>, 국가무형문화유산 <태평무>을 선보인다. 이어 <원왕생-巫>는 강선영 선생이 1963년 국립무용단에서 안무한 무용극 「열두무녀도」와2000년 <한성준 선생 그 춤의 재현>에서 발표된 「바라춤」 강선영무용단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표되어온「무당춤」을 2022년에 재구성하였다. 공연은 무료이며, 공연 전후 진도 읍내와 국악원을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제공한다.또한,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을 위해 12월까지 공연 스탬프 쿠폰 이벤트를 진행하여 참여한 관람객들에게 소정의 기념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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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1) <br>문일지 명인의 '살풀이춤' 춤사위살풀이춤 살풀이춤은 살풀이 가락에 맞춰 슬픔을 환희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인간의 감정을 아름다운 춤사위로 표현하는 춤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큰 고전무용이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이라는 이름의 수건춤이었으나 춤꾼 한성준이 1903년에 극장공연에서 살풀이란 말을 쓴 데서부터 살풀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문일지 1945년 출생. 1976년 창단된 서울시립무용단 초대 단장으로 위촉되어, 1989년 말까지 단장직을 역임했다. 전통춤을 발굴하고 재현하는 한편, 다수의 창작 무용극을 발표했다. 문일지의 무용극은 주로 역사적 사실을 그려냈으며, 궁중 정재에 주력해오다가 궁중무용이나 민속놀이 재현 작업에서 다양한 춤사위를 선택하여 호평을 받았다. 또한, 무속에 이용되던 방울과 딱딱이 등을 비롯해 기존 악기의 새로운 연주법을 적용하기도 했다. 주요 안무 작품으로 '바리공주', '땅굿', '맹가나무 이야기', '노', '파도' 등이 있다.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상임안무가 재임시 창작무용 '벼'(1990년)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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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조춤의 대가, 김진걸산조 춤의 명인 김진걸(金振傑, 1926-2008) 1926년 출생, 2008년 사망. 서울 출신의 무용가이다. 조택원의 뒤를 잇는 한국무용계의 맏형이자, 한국 신무용의 2세대를 대표한다. 1955년 동양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진 이래, 모두 11차례의 개인 발표회를 여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규모가 큰 무용극보다 '산조'(散調)등의 걸작을 만들었다. 아울러 김진걸무용연구소를 설립해 김영희, 조흥동, 이운철, 정명숙, 문일지 같은 재능 있는 무용 인재들을 배출했다. 그 밖의 주요 출연 작품으로 <영은 살아 있다>, <심청> 등이 있고 주요 안무 작품으로는 <배신>, <향토의 선율>, <초혼> 등이 있다. 제자로는 임미자, 조흥동, 민준기, 이운철, 정명숙, 김세일라, 문일지, 김숙자, 김경자, 심의식, 정금란, 조카딸 김수남, 정창영, 유정숙 등 우리 무용계를 빛내는 명인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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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처용무 보유자 故 김천흥 자료집 발간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과 처용무 보유자인 고(故) 김천흥(1909~2007)의 무보, 공연사진 등 자료 1186건이 실린 자료집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6년 만에 나왔다.우리나라 무형유산 발굴과 전승에 지대한 공헌을 한 김천흥의 무악(舞樂) 인생은 1922년 이왕직아악부 아악부원양성소에 입소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왕직아악부는 일제강점기 왕립음악기관으로 국립국악원의 전신이다. 김천흥은 이곳에서 해금과 양금을 전공과 부전공으로 수련했다. 궁중정재를 전수받아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50세 탄신 경축 연회에 무동(舞童)으로 참여했다.김천흥은 어린 시절 전수받은 궁중정재 외에도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궁중정재를 복원·재현하여 명맥이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아악부원양성소 퇴소 뒤에는 승무, 살풀이춤 등 민속무용을 섭렵하고, 전국 각 지역 탈춤을 발굴해 연구·조사했다. 전통을 기반으로 한 작품도 여럿 창작해 우리 전통무용과 국악을 보존했다. 전통을 기반으로 한 작품 창작에도 관심이 많아 창작무용극도 여러 편 무대에 올렸다. 해방 뒤에는 왕실 잔치에서 공연되는 연주곡·노래·춤으로 이루어진 궁중정재를 복원·재현해 명맥이 이어지게 했고, 각 지역 탈춤을 발굴조사해 공연장에 올렸으며, 창작무용극도 여러 편 짓는 등 조선시대 무악유산 전승과 대중화에 이바지했다. 이번 기증자료집에는 1920~30년대 이왕직아악부 시절 사진, 해금과 양금 등 김천흥이 직접 사용했던 악기, 춤 동작을 그림으로 작성한 친필 무보(舞譜), 공연 때 입었던 복식 등 유족이 기증한 자료 1186건이 실렸다.특히 해금은 아악부원양성소 시절부터 전공으로 삼아 종묘제례악에서 해금 보유자로 활동했던 김천흥의 음악 인생을 보여주는 악기다.김천흥이 직접 대본을 쓰고 안무를 구성해 1959년 초연한 '처용랑' 대본과 홍보물, 공연사진은 전통음악과 춤을 바탕으로 기존과 다른 무용극을 새롭게 보여주고자 했던 김천흥의 시도를 보여주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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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타고난 안무가 전황의 춤인생과 예술세계국악계로 지평 넓힌 정통파 무용가 이매방(1927-2015.8.7, 국가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 27호 승무보유자), 강선영(1925-2016.1.21., 국가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보유자), 김덕명(1924-2015.10.24, 경남무형문화제 제3호 한량무보유자) 전황(1927-2015,5,16,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국립창극단장)등 원로무용가들과 중견무용가 정재만(1948~2014), 임이조(1950~2013), 지희영(1949~2015) 등의 작고는 격동기 근대무용사의 산증인들이자 역사적인 인물들, 과거사를 증언해주고 알려줄 대영박물관과 같은 역사자료가 소실된 것 같은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다. 전황선생님은 80대에도 청년같은 외모와 건강한 모습으로 공연현장에서 유일한 원로관객으로 뵙던 분으로 가장 장수하실 것 같았는데 지난해 갑작스런 비보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간 전황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말쑥한 양복차림, 반듯한 자세로 빼어나게 멋진 노신사의 모습에 부러움과 존경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과 불가사이한 점도 많은 분이라는 데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80대 고령임에도 청년같이 건강하고 멋지고 미남인 신사로 사셨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세계적인 근대무용가 최승희의 정통파 제자이면서 몇 안 되는 남성 한국무용가인데 어찌하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악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는가? 타고난 공연예술의 스타집안과 성장배경 전황(全璜, 본명 전두황)은 1927년 3월8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에서 전영술과 신명이의 5남3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부친 전영술은 함흥시 재판소 앞에서 사법서사를 하며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부친은 해방 직후에 작고하였고, 모친은 6·25전쟁 직전에 작고하여 어려움도 겪었지만 형제자매들이 대중스타로 우뚝 솟아 있었기에 전황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맏형 전두옥은 역시 함흥출신 무용가 조택원과 고향친구였고,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와 절친으로 영화배우 겸 권투선수였으며, 중국에서 배운 18기 무예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고, 승용차를 팔로 끄는 차력도 자랑했다. 누나 전옥(全玉, 배우, 본명 전덕례, 1911~1968)은 ‘눈물의 여왕’으로 무대와 스크린의 톱스타인 그녀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셋째형 전두철은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사촌형 전운봉은 남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였고 북쪽에서도 인민배우로 대접을 받았다. 누나 전옥과 매형 강홍식(姜弘植, 1902~1971, 이시이 바꾸의 제자, 해방공간 당시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소장, ‘봄타령’을 처음 부르고 유성기음반 취입한 가수)의 딸 강효실(姜孝實, 1932~1992)도 다 아는 영화배우이며, 강효실의 아들 최민수도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어 전황의 가계가 한국 근현대공연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황의 딸 전미례는 본래 한국무용을 전공하였지만 아버지처럼 분야를 바꾸어 ‘재즈계 여왕’이라 불리는 재즈무용가로 활약하고 있다. 전황의 어린 시절 누나 전옥이 함흥 진사관에 공연하러 고향이 오면 집 앞에는 스타 전옥을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때 열서너 살 된 전황은 자랑스런 누나의 연극을 보기위해 친구들과 공짜손님으로 극장을 드나들곤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황은 1941년 함흥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함흥상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예인의 삶 속에 젖어들어 갔으며, 맏형 전두옥의 영향을 받아 1946년(19세)까지 권투선수생활을 하면서 강인한 체력과 민첩한 몸동작을 단련하였다. 이러한 가계내력과 성장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국가적인 스타가 될 만큼 수려한 외모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며, 형제들과 친척들이 예술가들이 많다 보니 전황도 자연스럽게 그런 무용, 국악 등 전통문화를 익힐 수 있는 가정환경이었다. 또 새로운 문물, 스포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문물과 예술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여 뛰어난 연기력, 체력의 유전적 DNA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황선생님의 인물치레가 범상치 않은 점은 이러한 천부적인 집안내력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유명 연기자들과 예술스타들이 타고난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과 노력이 가미될 때만이 보석의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말년까지 정정하고 강건한 자태와 인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맏형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권투선수의 기초훈련에서 익힌 날렵한 잽 동작과 발 스텝과 빠른 호흡과 민첩성 등으로 무용가로서의 유연성과 리듬감, 손놀림과 발놀림 등의 신체적 바탕을 갖추게 된 것임도 알 수 있다. 최승희 제자로의 입문배경과 공연활동 전황의 춤인생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 세계무대에도 잘 알려진 무용가 최승희와의 조우에서 비롯하였다. 1947년 3월 최승희가 전황의 고향 함경남도 함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침 남녀무용수 단원을 한명씩 뽑는다는 소식에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응시하였다. 전황은 젊은 혈기에 한번 도전해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하여 오디션을 받았는데 뜻밖에 최승희의 눈에 들어 많은 젊은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남자로는 유일하게 합격통지를 받고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으로 무용경력도 없었던 전황은 1등 합격으로 운명적인 춤인생이 시작되었다. 권투선수로 다져져 손발이 빨랐고 눈썰미가 좋아 최승희의 춤시범을 센스있고 날렵하게 잘 따라 추어 무용수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1946년 8월 개소) 3기 연구생으로 입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하고많은 거 놔두고, 남자 놈이 춤을 추냐’고 반대했었다. 전황은 집에 있는 공기총과 아코디언을 팔아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갈 여비를 만들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받는 국비 400원과 전옥누나에게 받은 용돈 50~100원, 어머니가 보내주는 100원으로 생활비를 삼아 알뜰하게 살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30여명의 연구생이 묵는 기숙사생 중에서 최승희의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배우는 수제자로 발탁됐으며 이로 인해 국비를 300원씩 더 받게 되었다. 당시 북측 정부에서 최승희에게 국비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최승희와 안막선생님께 면회를 요청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전하니 국비 중에서 추가로 200원씩 더 지급해 주었다. 이곳에서 전황이 신흥(新興)무용(지금의 현대무용), 조선춤, 남방춤, 러시아춤, 발레 등을 배울 때 바로 위 선배로 김백봉도 있었다. ‘딴 딴 따따딴, 딴 딴 딴딴딴’ 최승희선생이 북을 치면 그대로 발맞춰 따라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웠다. 반주악사가 없을 땐 리듬감각이 탁월하다며 북과 장구를 치게 했던 것이 국악을 섭렵하는 시초가 되었으며, 이렇게 국악에 눈떠 훗날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바탕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 후 전황은 국비 외에 800원의 월급도 받았는데, 그에겐 금전적인 수입보다 4년 동안 허실없이 배운 최승희 안무법과 음악선택법이 소중할 뿐이었다. 최승희 안무의 ‘초립동’은 안성희에게 배워 1947년(20세)에 추었다. "최승희 선생은 히스테리가 많았어요. 1948년 평양예술극장에서 제가 안성희·김백봉과 3인무 ‘옥중투사’를 추는데, 객석에 앉아 계신 어머님과 사람들이 ‘황아! 황아!’ 부르며 야단이셨죠. 그 소리에 저는 춤순서를 잊어버렸죠. 결국 최선생께 혼나고 긴 손톱으로 꼬집혀 살이 뭉개졌죠.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셨고, 기억력, 창작력,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셨구요” 전황은 1948년 고된 훈련 중에도 단원들 누구보다 동작과 자세, 그리고 순서익히기에서 남다른 끼와 천부적인 표현력을 인정받아 최승희무용단원으로 중국순회공연을 처음으로 다녀왔다. 중국순회공연을 하던 중 매란방의 〈손오공〉을 보게 되었는데 분장실의 매란방은 남성인데도 춤출 때는 여자같이 곱게 추었다고 하였다. 당시 최승희는 안무작업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매일 아침마다 두 달 동안 몰래 숨어 ‘노사공’ 안무를 보던 전황이 결국 최승희에 발각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스승은 ‘재주있는 놈’이라며 악사 옆에 앉아서 보라고 승낙하였다. 이렇게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4년 동안 최승희의 작업, 공연, 생활 등 모든 것을 전황과 김백봉만이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산증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7일에는 100명 규모의 방소예술단원으로 출국하여 9일 걸려 러시아 모스코바에 도착했었다. "하루 종일 달려야 역 하나가 나와요. 치타에 도착하니 거지 떼들이 몰려들어 돈 달라, 빵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우리도 기차 안에서 빵과 과자를 배급받아 먹었을 뿐인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당시 소련) 모스크바 공연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정숙 단장이 ‘조국전쟁이 일어났다. 남한이 쳐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방소예술단은 정치적 색채를 띤 단체였어요. 러시아 공연도 이미 약속된 공연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허정숙은 전쟁 중에도 예술단을 이끌고 공연을 감행하였지요. 러시아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공연장이었어요.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했는데, 무대에서 탱크가 돌고 10마리의 말이 거니는 규모였습니다.” 그 후로 예술단은 밤마다 이동해 귀국길에 올랐다. 평양으로 돌아온 후에 전황을 비롯하여 최승희무용단원들은 춤연습을 하다가도 폭격이 오면 최승희연구소의 지하실에 피하곤 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 구민관에서 ‘해방의 노래’를 공연했다. 어수선하고 자유롭게 나다니지도 못했는데 장추화, 송범 등이 구경을 왔었다. 전황은 군인으로 위장하고 동양극장에 출연하는 전옥의 충정로 집으로 갔는데, 누나는 없고 그 집은 민청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전황은 이산의 고통을 억누르며 ‘초립동’과 ‘목동과 처녀’를 추었다. 춤출 때는 이산의 고통을 잊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날 꿈만 꾸었다. 1950년 8월 예술단은 광주. 목포(여기서 이매방이 안성희와 전황의 춤을 봤다는 생전 증언을 들었다), 군산을 순회공연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길인 조치원에서 북한 군표와 남한 돈을 한 뭉치씩 받았다. 전황은 남한 순회공연을 하다 철수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되돌아가던 중 최승희의 딸 안성희 일행과 헤어졌다. 중도에 안성희는 인민군에 붙잡히지만 최승희의 딸이어서 평양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가을 전황은 최승희딸 안성희와 헤어져 빨치산 잔류들과 산을 타고 군화 소리 난무하는 평양에 겨우 도착하였다. "최승희 무용연구소로 가니 러시아에서 공연할 때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족은 없었다. 양복과 구두 등을 챙겨 스승 최승희가 있는 자강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전황의 운명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평안도 석암에서 과일을 사러 가다 예술단 악사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최승희도 여기 있다. 자강도로 가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누나가 있는 남한으로 가라”하였다. 그때 안성희와 김백봉도 만났다. 그리하여 전황은 석암의 악사네 집 지하에 숨어버렸다. 순수예술가로 살 길은 남한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는 산길에서 사흘을 굶고 허기져 살길이 막막해 허리띠를 나무에 걸었다. 목을 매 자살하려는 순간에 드라마같은 일이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연주자 최옥삼(가야금산조 명인, 최승희 반주자)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며 말렸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숨어 있다가 숨은 사람들 대표로 전황이 미국 제일기갑사단 대적선전대를 찾아가 "최승희 제자지만 전옥의 동생”이라 하여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1951년 1·4후퇴 때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그때 조카 강효실(당시 20세)은 작가 이서구(백조가극단 작품 집필)가 지프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충정로 누님댁에 가니 누님과 재혼한 매형 최일이 있더군요. 후에 누님댁은 트럭을 빌려 부산으로 피란가고 저는 국민제일 군위병으로 뽑혔으나 늑막염으로 군면제를 받고 뒤늦게 부산으로 갔죠.” 전옥은 백조가극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대스타인 김승호, 허장강, 배삼룡, 고복수, 황금심 등 백조가극단장 전옥의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작고 전에 현재 육군사관학교 뒤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배밭을 소유했는데 남편 최일이 훗날 그 땅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전쟁은 함흥부자인 전황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북한에 생활기반을 둔 채 남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힘겨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중부터 안무가로 인정받은 남한생활 1951년 부산피난시절 전황은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개소하여 전옥누님이 단장으로 있는 백조가극단과 무관하게 활동했다. 정인방이 전황을 찾아와 부산극장에서 공연할 무용극 〈처용랑〉의 마귀역할을 이인범(발레)이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한다고 대신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본도 없이 음악을 맡은 나운영의 집에 가 피아노곡을 듣고 안무하여 마귀옷을 입고 현대무용같은 발레를 추었는데, 안무를 잘했다는 평을 받았다. 1953년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춘앵 등이 주축인 여성국악동호회(여성국극의 효시, 1948년 창단)에서 활동하는 최승희 반주악사였던 박성옥을 따라 동래온천장에서 창극연습에 참가하여 유치진 작 창극〈가야금〉 초연 때 아쟁(박성옥으로부터 이미 배웠음)을 연주하였다. 그때 전황은 박성옥의 연주를 돕다가 한영숙의 춤 〈가야금의 노래〉를 보는데 안무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춤판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햇님창극단장 김주전이 한영숙에게 전황이 최승희 제자니 한번 시켜보라는 귀뜸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한영숙이 전황에게 안무해보라고 부탁해 인정받은 것이 오늘날까지 안무가로 자신감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성군무인 만큼 춤은 추지않고 안무에만 열중하여 여성국악동호회의 후신인 햇님창극단은 잘 나가게 되었고 전황은 안무가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작품 〈햇님달님〉에서 라이벌인 박귀희(햇님)·김소희(달님)가 노래하고 안무는 전황의 몫이었다. 국악을 듣는 귀가 있으니 다른 이가 일주일 걸릴 안무를 하루나 이틀에 완성했다. 동래온천장 공연은 자금이 넉넉해 신선놀음이었지만, 여성국극단이 예닐곱 개씩 생기다보니 서로 제살깎기식 경쟁을 했고 결국 해체를 거듭하다 국립창극단이 태동하게 되었다. 당시 출연료는 명창이 1만원, 악사는 9천원, 안무가는 6천원 정도 받았다. 돈을 벌게 된 23세 전황은 1951년 11월 이조판서를 지낸 집안의 딸 다섯 살 연하의 김봉선과 금정사에서 결혼하였다. 여성국극에 반한 동래여고 출신 김봉선이 햇님창극단 오디션에 뽑혀 무용수로 투입되면서 사귀다가 눈이 맞았었다. 처형이 예기 김강남월로 7세에 레코드를 취입한 천재소녀 명창이었다. 그가 소리한 뒤 순서에는 서로 무대에 나가길 꺼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당시 누님 전옥은 예술가가 일찍 결혼하면 신세망친다고 반대했었지만 결혼 후에는 처가살이를 했다. 첫아이는 출생 직후 죽었고 5년 후 태어난 전미례(52·서울전미례 재즈무용단대표), 죽은 딸의 이름 ‘미례’를 다시 붙였다. 전황의 2남2녀 중 맏딸 전미례만 춤을 물려받았다. 펄펄 나는 힘과 예술적 열정을 미국 재즈유학에 쏟았고 국내 재즈무용계 무용학 박사 1호를 기록했다. 6·25 전쟁 후 부산에서 북한 출신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 때 최승희 제자인 전황은 전옥의 신원보증으로 안무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인범, 송범은 활동하지 않았고, 김백봉도 북한출신의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조용했었다.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터전이 국극판이었다. 김백봉, 강선영 등도 여성국극단에서 안무했었다. 국극에는 오프닝춤, 상징춤, 경사춤, 피날래춤 등 적어도 너댓 가지 춤이 필요했다. 전황은 국극을 안무하며 창을 계속 들었기에 귀명창이 되었다.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창을 들으며 누구보다 빨리 안무했다. 50여년 이상 국악을 들으며 입으로는 안 되지만 손하고 가슴 속으로는 연주가 가능했다. 〈벌에 쏘인 꽃〉 등 수많은 국극과 창극을 안무했다. 대표작은 첫 작품인 〈가야금〉.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우륵을 따라간 가실왕과 그를 사모한 배꽃아기의 사랑이야기 자체가 건전해 마음에 쏙 든다고 했다. 무용작품도 전황류 〈부채춤〉, 〈장구춤〉, 〈소고춤〉, 〈장검무〉, 무용극〈황우와 우미인〉, 〈시집가는 날〉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시 명창 박귀희와 김소희는 형님아우 하면서 잘 지냈지만 서로 최고이고 싶어 했고, 서로 전황에게 하소연했었다. 박귀희의 명성이 더 앞섰기에 김소희는 늘 불만이었다. "내가 나이도 위고 소리도 잘 하는데 왜 밤낮 박귀희 다음에 김소희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박귀희는 스스로 김소희만큼 소리가 못하다는 걸 깨닫고 가야금병창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김소희는 판소리로 지정받았다. 북한출신이고 최승희의 제자라는 이유로 소외시켰지만 실력으로 춤을 인정 전황은 최승희 선생에게 배운 춤을 바탕으로 창작했으니 내 몸에서는 항시 최선생님의 춤냄새만 난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자 무용만으론 생활비가 되지 않자 영화사 일도 하고 백조가극단도 봐주고 돈이 되는 일이면 창극단 안무도 하는 등 최승희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춤실력과 안무력을 바탕으로 바쁘게 살았다. 또한 늘 북한콤플렉스가 있었다. 예를 들어 흰 의상과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 빨간색이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보자고 하여 누가 안무했느냐? 왜 빨강색 의상이 가운데로 몰리느냐? 꼬치꼬치 따져 마음대로 창작할 수 없었다. 또 남한 무용가들은 '이북에서 온 주제에 어디를 넘봐' 하는 식으로 질투하기도 했다. 부산피난시절 여성국극단 안무를 할 때 "전황이가 누구냐” 고 하더니 무조건 쇠고랑을 채운 적도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간 그에게 "왜 남한으로 넘어왔느냐”면서 간첩취급을 했다. 물론 매번 누나 전옥이 보증을 서서 풀려났지만 그 후로도 국가보안법으로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북한출신임을 숨겼지만 전황은 스스로 떳떳하게 밝히곤 하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김백봉과 남편 안제승도 종로경찰서에 불려갔으며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받았다. 올림픽 때 안무를 맡고 싶었는데, '전황이는 이북에서 왔다'며 그를 추천하지 않아 참여를 못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무용가들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행사안무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자리를 얻었다. 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는 실력 있다고 알아주었다. 한국민속예술단원 및 안무자로서의 왕성한 해외활동 1958년 국극의 전성기까지 안무가로 활동한 전황은 결혼 후 서울로 이주하여, 1963년 광화문에 신흥무용학원을 내었고, 체계적인 춤교육 덕분에 조교를 두 명이나 두고 지도하였다. 1963년 서울민속무용단 활동과 더불어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합창단, 무용단, 관현악단 등 300명의 단원들은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해체와 재창단을 거듭하며 예그린도 100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말기 멤버로 동참한 전황은 권려성의 후임으로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 및 안무·연출을 맡았으며, 1964년에는 명동국립극장에서 이틀 동안 제1회 춤 발표회를 가졌다. 이틀 공연은 대박이었다. 흥행사가 붙은 공연은 대전에도 초청됐다. 당시 김백봉은 필동에 연구소를 차렸고, 장추화의 제자 송범은 현대무용을 추었다. 그 후에도 1967년까지 매년 전황 민속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1967년 정일권 국무총리 때도 계속 민속예술단에서 활동했다. 1968년 한국민속예술단 지도위원 및 출연자로 멕시코 올림픽·일본 공연을 하였다. 송범, 김백봉, 김문숙, 전황 등과 함께 조택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들은 세계 각국을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 때 전황은 〈부채춤〉 〈농악〉 〈장고춤〉 〈무당춤〉 등 동적인 춤을 안무하고 추었다. 1970년 정부문화사절단 지도위원으로 일본 및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였고, 1971년 정부문화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레바논 일본 등 순회공연, 1972년 정부문화사절단 무용총감독으로 유럽·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24개국 순회공연, 1973년 문공부 파견 일본 신주쿠 고마극장에서 〈춘향전〉 안무와 국립창극단 〈배비장〉 안무를 하였다. 1976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문공부 파견으로 일본 도쿄국제극장 쇼치구가무단의 〈심청전〉을 안무하였다. 1977년 정부문화사절단 유럽 11개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8년 하와이이민 75주년 기념 한국민속예술단 연출·안무를 맡았으며, 1981년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공연 및 대예술제에 연출·안무로 농악을 올렸다. 이처럼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적 행사와 해외공연의 안무자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무용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흩어진 〈농악〉을 무대화한 주인공이 바로 전황이다. 한두 시간씩 치는 농악을 15분 정도로 압축해 많은 가락과 춤사위를 정리했다. 김덕수와 최종실 등 사물놀이패가 구성되기 전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좋은 점을 뽑아 50~60명이 오르는 무대농악으로 구성했다. 처음 선보인 건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공연에서다. 교방춤과 마당춤을 극장예술로 다듬으면서 극장양식의 변화를 주도했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과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한 전황 최승희 제자로 안무가와 무용가로 활동한 전황이 어찌하여 무용협회 활동을 하지 않고 국악협회로 발을 돌렸을까 의문이 든다. 1964년 한국국악협회 무용분과위원장을 맡고 14년 동안 국악협회 활동을 하다가 1988부터 1991까지 한국국악협회부이사장으로 활동한 배경도 무용계에서는 북한출신이라는 배타성, 남성이 남성춤을 추지 않고 여성춤에만 치중하는 모습, 성정체성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된 그는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하는 대한민국국악제를 협회 주최로 이끌어 오는 등 40여 년 동안 한국국악협회에서 역동적인 남성춤을 안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타악과 현악과 성악을 터득하여 국악계에서 활동한 것이다.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은 1973년 〈배비장〉 안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물론 여성국악창극단이 활동한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창극에서의 역할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어서 1999년 중국 베이징 국극공연 〈황진이〉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그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고법(鼓法) 이수자가 되었다. 고법은 창극단 시절 한일섭과 정철호로부터 조금씩 배워 연주에 참여했던 것을 인정받아 이수증을 받게 된 것이다. 2000년 창작민요극〈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 있었네〉와 창무극〈해상왕 장보고〉를 안무했다. 일본어능력시험 1급 자격도 땄다. 일본공연을 자주 가고 일본작품 〈제비〉도 번역할 정도였다. 2002년 문화재청 파견 한·일문화교류의 해 〈천년의 소리〉 일본순회공연 예술총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2004년 국립창극단 자문위원을 위촉받아 자문하였고,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로 10년을 출강하여 마지막까지 춤열정을 후학들에게 쏟았다. 그리고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의 대상으로 춤과 국악 생애를 증언하였다. 다만 장년 이후 춤을 많이 추지 않고 안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제자가 많지만 어려서부터 춤을 배워온 윤성주와 딸 전미례 등이 있고 말년의 제자로는 김지원, 백선희 등이 있을 뿐이다. 전황의 예술세계 전황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문하에서 사사했고, 1951년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과 안무연출을 맡는 등 정부 문화사절단으로 각국에서 '춘향전', '심청전'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한국민속예술단원과 안무자로 유럽 3회, 동남아시아 2회, 미국, 러시아, 중국, 중동, 일본 등 당시엔 한 번 나가기도 힘들다는 외국 공연을 수십 차례 다녔다. 덕분에 국민훈장인 동백장도 받았다. 1988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199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96~97년 국립중앙극장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무용계뿐만 아니라 국악계에서도 널리 업적을 남겼다. 전황이 남긴 예술혼과 예술철학은 몇 가지 굵직한 교훈과 한국공연예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첫째, 최승희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창작력과 뛰어난 안무력을 바탕으로 민간예술을 민족적 무대예술로 승화시킨 점이다. "저, 최승희 제자예요. 최승희! 최승희 무혼(舞魂)의 흐름이 제 춤에 들어 있다고요. 그 자부심 하나로 이 땅에서 타협하지 않고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살았습니다.”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던 최승희가 전통악기를 개량한 악기반주에 맞춰 민족무용과 국극을 안무하고 창작하던 것을 이어받은 전황은 안무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 ‘마당농악’을 ‘무대농악’, ‘민간춤’을 ‘무대춤’ 등으로 민족무대예술을 발전시켰다. 둘째, 북한출신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서 이념갈등 속에서도 남한예술가로 자리매김하며 본인만의 순수공연예술작품을 창작하였다. "북한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저를 보자고 하여 마음대로 창작할 수도 없었죠.” 때로는 쇠고랑도 채웠고,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간첩취급도 당하는 등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많이 받았으며, 북으로 넘어간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편견이 상존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운 고향마저 버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남한을 택했고, 굴하지 않은 신념으로 자신만의 예술혼을 살려보고자 각종 공연예술에 전념하였다. 셋째, 여성편향적 경향과 비중에 편향된 사조에 맞서 외롭게 역동적인 남성예술의 복원과 추구에 앞장서 남녀예술의 균형발전과 공존사상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최승희 선생께 남성춤, 여성춤을 확연히 구분해 배웠는데, 왜 남성들이 그리 여성스럽게 추는지‥‥‥‥” 여성춤은 곱고 이쁘지만 남자는 남자다운 춤을 추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살풀이춤, 입춤같은 춤을 춘 적도 없고 장검무, 소고춤, 장고춤, 농악춤 등 남성성이 강한 춤을 추고 가르쳤다. 혼자의 힘으로 대세를 역전시키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는 남성은 치마(여성)춤만 추지 말고 바지춤을 추어야한다며 남성예술과 여성예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일념으로 살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매방이 가장 춤을 잘 춘다고 했다. 60여년 친구이지만 전황은 남자가 여자처럼 춤추는 게 싫었다. 최승희 문하에서 수년 동안 남성춤과 여성춤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상이 골수에 박힌 그는 춤추는 남성들의 대부분이 여성화된 춤을 추는 게 못마땅했다. 그때부터 그는 무대가 좋지만 무대에 가급적 서지 않았다. 여성적인 춤을 추는 이들과 동일시되는 게 싫었다. 게다가 딸 전미례가 아버지의 성정체성과 취향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해 그때부터는 가끔 서던 무대마저 무대화장을 전혀 하지 않다가 전두환 대통령취임식 때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넷째, 한민족예술의 본질인 가무악(歌舞樂) 일체사상과 악무극(樂舞劇) 합체사상을 표방하고 심어주었다. "국악을 알아야 무용을 창작할 수 있어! 특히 장단의 귀가 뚫려야 산조를 들을 줄 알아야 춤을 만들 수 있지!” 우리 민족은 원래 국악따로 무용따로가 없이 악가무 일체의 예술적 특성을 지닌 민족이다. 전황은 이러한 민족예술과 춤의 본질적 특성을 올곧게 지닌 예술가였다. 서구예술의 전공분화시대에서 소외됨을 무릅쓰고 총체예술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였다. 전황이 한국예술계에 남긴 것 한국 신무용의 핵심이 최승희에서 비롯됐기에 스승 최승희에 대한 기억을 소상히 간직한 전황의 자부심은 귀하고도 올곧았다. 최근까지 남한에 생존해있는 최승희의 대표제자로는 김백봉과 전황뿐이었는데, 유일한 남자제자인 전황선생님의 작고는 신무용시대의 대표적인 적통자이며 전승자의 인맥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평생 최승희의 춤사상을 실천하고 끊임없이 남성춤을 추구해온 근대무용의 산증인이었으며, 무대농악의 창시자이고 국극과 창극에서도 영원한 안무자로 자리매김하여 국악계의 수장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등 한국 근대예술사의 한 획을 긋고 떠났다. 끝으로 전황은 예술계의 간디라는 생각이 든다.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 평화주의자이였듯이, 전황은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스타집안의 피를 이어받았고 당시 세계적인 한국무용가 최승희의 남성제자였기에 한국무용계에서 스타반열과 직책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여러 정체성 문제로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도 묵묵히 세태에 복종하지 않았고, 이념전쟁의 희생양이었지만 본인만의 색깔과 예술혼을 불사르며 국가, 사회, 문화계에 무언의 항거를 보여주었다. 국악계로 발을 돌려 커다란 족적을 남기면서 끝까지 무용계를 탓하지 않았다. "전황류 소고춤, 전황류 검무, 전황류 쌍검무, 전황류 농악을 만들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혼이 들어가 있다는 거죠. 남자는 남자답게 씩씩하게 ! 그래서 저는 절대로 무대에 오를 때 화장하지 않았습니다. 미례가 나의 성정체성에 의심을 품을 때부터 완전히 화장을 그만두었죠.”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아쉬움도 남는 법이어서 전황선생님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떠오른다. "피리 등 관악기만 못해보고 타악과 현악은 웬만큼 해봤지! 그런데 아쉬움이라면 거문고 산조를 못해본 것이 가장 한이 맺혀! 술대로 현을 드르렁 긁는 소리가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멋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수상〉국무총리표창(68년), 문화공보부장관 표창(69·70·71·72년), 국민훈장 동백장(73년), 문화공보부장관 감사장(81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공로패(82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98년), 문화재청 공로 감사장(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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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애 무용극 “강강숲에 떨어진 달님”국립민속국악원(원장 김중현)은 오는 11월 3일과 4일 오후 3시, 국립민속국악원 예원당에서 무장애* 무용극 "강강숲에 떨어진 달님”을 개최한다. 무장애 공연(배리어 프리, Barrier free)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 공연을 관람하는데 따르는 여러 가지 물리적, 제도적 장벽을 허물어내는 운동이다. 국립민속국악원은 장애인도 불편함 없이 국립민속국악원에서 공연을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매년 다양한 국악작품을 무장애 공연으로 제작해 지속적으로 선보일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첫 무대가 바로 무용극 "강강숲에 떨어진 달님”이다. "강강숲에 떨어진 달님”은 ‘강강술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더해 제작한 어린이 무용극으로 2022년 초연 이후 국립국악원, 전주세계소리축제 등에 초청되어 공연을 펼치며 관객의 큰 호응을 받은 작품이다. 특히 이번에는 무장애 무용극으로 수어통역과 자막해설, 음성해설을 더해진 작품으로 재구성하였다. 음성해설과 자막해설에는 배리어프리 영상 및 공연 전문인 ㈜사운드플렉스스튜디오의 강내영 대표가 참여하여 전문성을 높였으며, 전라북도수어통역센터에서 수어통번역 및 감수, 공연을 실시간으로 통역한다. 공연시작 전에는 무대의 공간, 소품 등의 사전정보를 음성해설로 듣는 터치투어가 공연장 로비에서 진행된다. 터치투어는 인원제한이 없으며 관람예약시 함께 접수할 수 있다. "강강숲에 떨어진 달님”은 무장애 공연의 특성상 10월 17일~20일까지 4일간 장애인 대상으로 우선예약을 실시하며 일반예약은 10월 24일~11월 1일까지 진행된다. 예약방법은 전화(063-620-2329)와 카카오톡(국립민속국악원 친구추가 후 상담하기)을 통해 예약할 수 있으며, 공연의 자세한 정보는 국립민속국악원 누리집(namwon.gugak.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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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 무장애 무용극으로 만나는 “강강숲에 떨어진 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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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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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과 회복', ‘2023 전주세계소리축제’ 15일 개막‘2023 전주세계소리축제’(조직위원장 이왕준)가 오는 15일 개막공연 ‘상생과 회복’을 시작으로 24일까지 10일간 한국소리문화의전당과 전주한옥마을, 전북 14개 시·군에서 펼쳐진다. 올해 소리축제는 ‘상생과 회복’을 키워드로 코로나19 이후 전면 대면 축제로 열리며, 북미, 북유럽, 중동, 중앙아시아 등 해외 11개국과 89개 프로그램의 108회 다채로운 공연들로 전라북도 일대에서 펼친다. 올해 소리축제는 그간 전통의 원형을 오롯이 담아 왔던 대표 전통 브랜드 공연들을 더 깊이 있게 담아낸다. 지역의 역사적 명소와 결합한 기획 공연을 비롯해 ‘배리어 프리’와 같은 새로운 형식의 공연도 선보이며, 소통과 협업의 강화를 통해 구축한 탄탄한 라인업도 기대된다. 소리축제 키워드와 동명인 개막공연 ‘상생과 회복’(연출 이소영)은 서양음악이 한국으로 전해진 후 한국적 정서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받아들여지고 발전해 온 ‘한국적 음악(K-Music)’을 보여준다. 인류가 마주한 어려움을 음악(축제)으로 극복하고 전통음악이 클래식, 월드뮤직 등 다양한 장르와 상생하며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담아냈으며, 축제의 놀이성이나 전통음악의 정통성과 공연의 예술성을 회복하겠다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전북의 대표적 오케스트라 전주시립교향악단(지휘 성기선)을 중심으로 가야금 연주자 문양숙의 협연과 차세대 소리꾼 고영열·김율희를 비롯해 세계적 바리톤 김기훈과 소프라노 서선영 등 국내외 정상급 음악가들의 협연으로 진행된다. ‘서양 오케스트라의 한국적 수용’을 위해 이건용·최우정·김성국·안효영 등 국내의 정상급 작곡가들의 개작과 편곡, 초연 형태로 곡이 연주된다. 특별히 ‘1945’ ‘달이 물로 걸어오듯’ 등을 통해 한국 오페라 최고의 작곡가로 부상한 최우정의 위촉 초연곡이 피날레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열흘간의 축제의 막을 여는 개막공연은 김관영 전라북도지사와 이왕준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의 개막선언을 시작으로 화려하게 문을 연다. 이번 공연은 장일범·박애리의 사회로 진행되며,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수준 높은 무대들이 100분간 펼쳐진다. 전통과 현대, 월드뮤직과 복합장르 등 7개 섹션으로 편성한 올해 소리축제 프로그램은 최고의 예술가들과 최고의 공연 라인업으로 구성돼 대표 프로그램을 꼽기 어려울 만큼 수준 높고 다채로운 공연들로 가득하다. 2023 축제의 방향성과 키워드를 담은 ‘포커스 2023’에는 개막·폐막 공연, 설치작품 ‘가이아’, 경기전의 아침 ‘풍류뜨락’과 ‘김대진&박재홍’ 피아노 듀오 공연이 포진되어 있다. ‘전통: 오래된 결’에서는 전통을 더욱 깊이 있게 담아낸 판소리 시리즈 ‘국창열전 완창판소리’ ‘라이징스타 완창판소리’ ‘청춘예찬 젊은판소리’와 ‘산조의 밤’ ‘시나위․춤 그리고 씻김’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창작&컨템퍼러리: 동시대 우리 음악’은 시대를 반영해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는 예술가들의 무대와 공연들로 구성됐다. 이자람 판소리 ‘노인과 바다’, 천하제일탈공작소 ‘오셀로와 이아고’, 블랙스트링, 악단광칠, 김소라 등과 판소리, 전통기악 기반의 창작 작품 ‘소리프론티어’ 등도 마련됐다. ‘클래식&대중음악: 소리 인터페이스’에는 ‘장한나&미샤 마이스키 with 디토오케스트라’와 ‘라포엠&정훈희’ 등 대중성을 지닌 공연들이 배치됐다. 전통과 오래된 것으로부터의 확장을 담아낸 ‘해외초청&월드뮤직: 대화와소통’에는 한국-캐나다 공동제작 ‘re:Orient’, 한국-폴란드 음악 교류 프로젝트 ‘미치&미치와 헤테로포닉 그룹’, 아부다비 문화관광부과 아부다비 버클리 음악대학 연계 교류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된 ‘타와슬 앙상블’, 2023 동아시아 문화도시와의 연계사업 공연, ‘핸드 투 어스’ ‘마리 칼쿤’ 등 각 나라의 오늘날 민속음악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가족과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어린이 소리축제: 헬로우! 패밀리’에는 어린이 무용극 ‘강강숲에 떨어진 달님’과 ‘전북어린이음악제’ 그리고 ‘가이아’ 아래에서 펼쳐지는 ‘어린이 그림그리기’ ‘칼림바 만들기’ ‘탈춤 워크숍’ 등 참여 프로그램들이 준비돼 있다. 지역의 힘과 저력을 느낄 수 있는 ‘찾아가는 소리축제&아카데미: 글로컬 랩’에서는 전북 14개 시·군에서 펼쳐지는 ‘찾아가는 소리축제’뿐 아니라 지역예술가들의 무대와 ‘판소리 아카데미’ ‘월드뮤직 워크숍’ 등도 만나볼 수 있다. 폐막작은 ‘이희문 오방신과 춤을!’이다. 국악인 이희문이 전주시민과 만나 춤파티를 벌이며 축제 마무리를 장식한다. 무대를 전주한옥마을 경기전, 전주 동헌, 전주대사습청, 건지산 편백나무숲 등으로 옮긴 공연도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김희선 집행위원장은 "올해 소리축제는 그간의 역사 위에 정통성, 예술성, 축제성을 더해 잠재적인 우리음악의 미래 가치를 담았다”며 "동시대성을 담아낸 우리 음악축제에 많은 분이 오셔서 함께 즐겨 주시기를 기대한다. 또한 예술가와 관객, 축제를 준비한 스태프들 모두가 행복한 축제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5일 개막에 맞춰 KTX 축제열차도 운영한다. ‘소리축제열차’는 개막공연에 맞춰 15일 오후 4시에 서울 용산역에서 출발한다. 탑승객들이 공연장인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 입장하면 축제의 막이 오른다. 김희선 위원장은 "공연예술축제로 변모한 소리축제는 우리 소리, 클래식, 아시아계 월드뮤직, 지역 예술인의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며 "예술가와 관객 모두가 만족하는 축제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올해 공연은 유료 17개, 무료 4개 등 총 21개 프로그램이다. 유료 공연은 ▲개막공연 상생과 회복 ▲국창열전 완창판소리 ▲라이징스타 완창판소리 등으로 구성됐다. 무료 공연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창작음악극 경계 ▲전북대 창작극 요즘 심청 ▲전주판소리합창단 그녀들의 이야기 등이다. 유료 공연은 인터파크티켓과 나루컬쳐를 통해 예매가 가능하며, 무료 공연은 나루컬쳐에서 예약할 수 있다. 야외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예약 없이 무료로 관람 가능하다. 자세한 사항은 소리축제 공식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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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무형유산원, ‘2023 전통연희 판놀음’ 벌인다.국립무형유산원은 오는 9월 1일부터 3일까지 ‘전통연희 판놀음-모던연희’ 공연을 개최한다.전통연희 판놀음은 전통적인 연희무대인 판의 열린 공간에서 공연자와 관객의 경계를 허물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소통형 공연이다.올해는 국립무형유산원 개원 10주년과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 20주년을 기념하는 ‘2023 무형유산축전’ 개막을 축하하며 화합과 상생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전통연희 판놀음의 첫 무대는 전승과 창조를 주제로 9월 1일 오후 7시 30분에 무형유산축전의 개막공연으로 펼쳐진다.신명과 화합을 알리는 ‘고무악’으로 문을 열고, ‘고성오광대’ 덧배기춤의 명인으로 알려진 이윤석 보유자와 그 후대 전승자들이 함께 3세대에 걸친 전승의 맥을 보여줄 ‘고성의 맥 이음’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탈춤에 대한 열린 상상을 창조적으로 보여줄 ‘추는 사람’ 등의 무대가 펼쳐진다.이튿날인 2일은 오후 4시 케이아츠 무용단의 변화무쌍한 창작춤판 ‘새로움을 더 새롭게’를 시작으로, 전국의 대표적인 탈춤을 한 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천하제일탈공작소의 ‘가장무도, 함께 탈춤’이 진행된다. 이어 판소리 흥부가를 재창작한 움직임팩토리의 무용극 ‘친구따라 제비간다’가, 마지막으로 연희집단 더(The) 광대의 재담꾼 안대천이 선보일 유쾌·상쾌·통쾌한 연희판의 땡처리 공연 ‘연희땡쑈!’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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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합과 상생의 가치 담은 ‘2023 전통연희 판놀음' 9월 개최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오는 9월 1일부터 3일까지 국립무형유산원 중정에서 '전통연희 판놀음 : 모던연희' 공연을 개최한다.23일 국립무형유산원에 따르면 '전통연희 판놀음'은 전통적인 연희무대인 ‘판’의 열린 공간에서 공연자와 관객의 경계를 허물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소통형 공연이다. 올해는 국립무형유산원 개원 10주년과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 20주년을 기념하는 '2023 무형유산축전' 개막을 축하하며 화합과 상생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전통연희 판놀음의 첫 무대는 전승과 창조를 주제로 9월 1일 오후 7시 30분에 무형유산축전의 개막공연으로 펼쳐진다. 신명과 화합을 알리는 ‘고무악’으로 문을 열고, ‘고성오광대’ 덧배기춤의 명인으로 알려진 이윤석 보유자와 그 후대 전승자들이 함께 3세대에 걸친 전승의 맥을 보여줄 ‘고성의 맥 이음’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탈춤에 대한 열린 상상을 창조적으로 보여줄 ‘추는 사람’ 등의 무대가 펼쳐진다. 고무악은 춤과 북 음악이 어우러진다는 의미를 담은 춤으로, 강렬한 연주와 절도 있는 춤사위가 특징이다. 9월 2일은 오후 4시에 ‘케이아츠(K-arts)’ 무용단의 변화무쌍한 창작춤판 ‘새로움을 더 새롭게’를 시작으로, 오후 5시에는 전국의 대표적인 탈춤을 한 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천하제일탈공작소’의 ‘가장무도:함께탈춤’이 진행된다. 오후 7시에는 판소리 흥부가를 재창작한 ‘움직임팩토리’의 무용극 ‘친구따라 제비간다’가, 마지막으로 오후 8시에는 연희집단 ‘더(The) 광대’의 재담꾼 안대천이 선보일 유쾌·상쾌·통쾌한 연희판의 땡처리 공연 ‘연희땡쑈!’가 펼쳐진다. 마지막 날인 9월 3일 오후 1시에는 전승자와 남녀노소 관객이 함께 만들어 내는 시민탈춤 공연 ‘마실가듯 탈춤’이, 오후 3시에는 사자탈과 하늘을 휘젓는 용들의 한판 놀음 ‘용호상박’이 개최된다. 이어서 ‘평택농악보존회’의 ‘점고(點考) : 다시, 시작을 울리다’는 역동적인 판굿과 개인놀음으로 흥을 돋우고 일상에 활력을 얻을 수 있는 신명의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한편, 전통인형극을 기반으로 한 예술단체인 '연희공방 음마갱깽'이 1~3일의 행사 기간 내내 인형과 관객이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막간 인형극 '여보, 마누라'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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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야외 '달빛 상영회'국립극장이 오는 8월 한여름 밤 무더위를 날려줄 야외 '달빛 상영회'를개최한다. 8월 9일·16일·23일, 저녁 7시 30부터 국립극장 야외 휴식 공간 해맞이 쉼터(해오름 극장 1층 발코니)에서 개최되는 이 행사에서는지난 2022-2023 국립극장 레퍼토리 시즌 공연작 중 화제작 3편의전막 실황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 8월 9일(수) 국립창극단 '귀토'를 시작으로 ▲ 16일(수) 국립무용단 '2022 무용극 호동'▲ 23일(수) 국립창극단 '나무, 물고기, 달'을 차례로 상영한다. 특히 '2022 무용극 호동'과 '나무, 물고기, 달' 공연 실황은 지난해 10월에 촬영한 것으로, 이번 상영회에서 최초로 공개한다. '무용극 호동'은 왕자 호동과 낙랑 공주의 사랑 이야기보다 사회 혹은 운명과 대립하는 극한의 상황에 맞닥뜨린 인간의 갈등과 보편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나무, 물고기, 달'은 한국·인도·중국 등 동양의 여러 설화에서 영감을 받은 창작 창극이며 어떤 소원이든 이뤄준다는 '소원나무'를 찾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관람객에게는 생생한 음질로 공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개별 무선 헤드셋이제공되며 여름밤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음료도 마실 수 있다. 좌석은 비지정석으로 운영되며 관객이 자유롭게 착석해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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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산국악원, 국악연주단 계성원 · 복미경 신임 예술감독 임명국립부산국악원(원장 이정엽)은 기악단·성악단 예술감독에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계성원씨, 무용단 예술감독에 복미경씨를 임명했다. 신임 예술감독의 임기는 2023년 7월 10일부터 2025년 7월 9일까지 2년이다. 계성원 기악단·성악단 예술감독은 중앙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작곡을, 한양대학교에서 지휘를 전공하였다. 2012~2016년 국립국악관현악단 부지휘자, 2017년~2020년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예술감독, 그리고 2021년~2023년까지 강원도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및 상임지휘자를 역임하였고,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음악 조감독 역임, 2005년 대한민국 작곡상 및 2010년 KBS국악대상 작곡상을 수상하였다. "국악의 동시대성 회복을 위해 국립부산국악원 기악단과 성악단만의 독창성있는 레퍼토리를 구축하고 전통의 이면을 담아낸 현대적 언어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예술적 가치와 경쟁력을 강화하겠다" 고 밝혔다. 복미경 무용단 예술감독은 현재 복미경무용단을 이끌며, 1991년~1997부터 국립국악원 무용단 단원, 2010년~2012년 국립남도국악원 무용단 안무자, 2014년~2019년 국립민속국악원 무용단 안무자를 역임하였다. 국가무형문화재 학연화대합설무 이수자로, 2018년 KBS 국악대상 무용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영남 지역을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 무용극 제작을 통해, 전통춤을 기반으로 그 본질과 가치를 탐구하고, 현 시대를 반영하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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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와도 거창한 ’아시아1인극제•거창‘ 개최...23일부터아시아 지역의 유일한 1인 공연 축제인 ‘아시아1인극제•거창 2023’이 6월23일~25일까지 경상남도 거창에서 열린다. 작년에 이어 유진규 예술감독(마이미스트, 전. 춘천마임축제 예술감독)이 전통을 현대적인 퍼포먼스로 작업하는 아시아 지역의 솔로 퍼포머들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난리버꾸통 축제를 연다. 한국, 인도-티벳, 일본, 미국을 포함한 4개국에서 25명의 솔로 퍼포머가 참가하는 본 축제는 3일 동안 박산합동묘역, 거창문화원 상살미홀, 삼봉산 문화예술학교로 옮겨 다니며, 묘역, 극장, 폐교, 운동장 등 다변화하는 축제 공간에서 관객과 하나가 되는 아시아1인극제•거창 2023 난리버꾸통을 펼친다. 축제는 6월23일 오전10시에 박산 합동묘역에서 거창민간인학살 사건의 희생자를 위한 제의와 ‘진혼무 - 이삼헌’으로 시작을 고한다. 개막공연은 23일 저녁7시 거창문화원 상살미홀에서 원조 1인 개그맨 전유성의 사회로 이은결 일루셔니스트, 배뱅이굿 인간문화재 박정욱, 인도-티벳의 카락 뺀빠, 연희춤꾼 문진수, 페미니즘 퍼포머 성희주, 거창 출신 춤꾼 백형민 등 각 분야의 독특한 1인 공연들이 펼쳐진다. 24일과 25일에는 거창군 고제면 삼봉산문화예술학교에서 전통연희, 마임, 퍼포먼스, 무용극, 음악극, 연극, 오브제인형극, 마술, 영상쇼, 복합장르 등 다양한 장르의 1인 공연을 만나볼 수 있다. 24일 밤 진행되는 ‘삼봉산 난리버꾸통’은 일본 후미히로 요시노의 부토, 김관희의 파이어 퍼포먼스, 여현수의 용기놀이와 함께 대동놀이 강강수월래, 달집태우기를 한다. 그리고 밤12시에 황해도굿 만신 서문정의 ‘작두굿’으로 제의와 놀이가 함께하는 아시아 공연예술의 정체성을 이어받은 난리버꾸통-난장은 정점을 향한다. 또한 한국전쟁 73주년을 맞아 24일, 25일에는 류희의 샌드아트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신은미의 라이브 페인팅 ‘한국전쟁’이 특별히 공연된다. ‘아시아1인극제•거창 2023’에는 공모를 통해 선정된 박창호, 송다민, 박효진등 11개 공모작품과 티베트의 1인 오페라를 선 보일 인도-티벳의 카락 뺀빠, 국제 아시아민속학회 해외이사인 재미교포 김환의 영상쇼, 일본 후미히로 요시노의 부토공연을 포함한 국내외 14개 초청작품, 모두 25개 작품이 공연된다. 올해 처음 진행되는 군민과 함께 하는 소외된 군민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으로 ‘1인극 택배요~’가 23일 오전10시 거창군 주상면의 북부안심재활노인주간보호센터 에서 진행되며, 어린이를 대상으로 1인극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어린이 1인극학교’가 마이미스트 조성진과 이정훈의 지도로 진행된다. 이 외에도 솟대만들기, 단오부채써주기, 사주&타로 등 다양한 부대행사와 지역 먹거리가 함께 준비된다. 올해로 33회째를 맞는 아시아1인극제는 전통을 주체적인 독창성으로 이어 나가자는 고 심우성 선생의 선언으로 1988년 서울에서 ‘아시아1인극제’로 시작하였고 2007년부터 거창에서 열리고 있다. 유진규 예술감독은 "아시아의 전통예술은 어느나라나 생존의 위기에 놓여있다. 그 중에서도 1인 공연 분야는 바람앞의 등불과 같다. 우리는 촛불 하나를 살리고 있는 예술가들이다. 작지만 빛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축제가 되겠다.”라고 전했다. ※ 참가 아티스트 라인업 공연자 장르 작품명 김관희 파이어퍼포먼스 파이어 앨범 Vol.5 김광용 인형극 피리부는 리어카 할아버지 김솔지 스텐딩연희 기체후 일향 만강하신지요? 김윤희 판소리 이야기쇼 김정태 타악 THE 장구 김혜경 춤 오!나의 페르소나 김 환(USA) 영상쇼 레퀴엠 바리, 바리 공주여! 류희 샌드아트 우리의 소원은 통일 / 누가 죄인인가? 문진수 연희&춤 뫼비우스(검사 위의 백사) / 천의무봉(설중사우) 박정욱 서도소리 배뱅이굿 박창호 탈연희 큰엄니 박효진 퍼포먼스 욕구에 대하여 백형민 춤 하늘을 나는 물고기 서문정 굿 작두굿 성희주 춤 노라 송다민 환술 환희:꿈같은 장난 신은미 라이브페인팅 몸짓 – 한국화 라이브페인팅 여현수 연희 용기놀이 이삼헌 춤 진혼무/레퀴엠, 바람의 빛깔 이은결 퍼포밍일루션 가시적 그리고 비가시적인 것들 조갑동 전통+전자음악 페인팅 전유성 사 회 조은성 창작연희퍼포먼스 삶의 무거움, 죽음의 가벼움 카락 뺀빠 (INDIA/TIBET) 춤, 전통오페라 티베트전통드럼댄스 <도외 도둥>/사냥꾼과 수끼 니마 황윤희 인형극 신통방통도깨비 후미히로 요시노 (JAPAN) 부토 넘버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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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장&매듭장의 실제 작업’을 무대에 올린 무형유산 공연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한국의 무형유산 공연인 '생각하는 손-흙과 실의 춤'을 서울과 베를린에서 각각 개최한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국립무형유산원 개원 10주년과 한독수교 14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공연은 6월 3일과 4일 양일간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서울 서초구)에서, 베를린 공연은 9월 26일 Admirals palast(아드미랄스 팔라스트)에서 진행된다. '생각하는 손'은 2021년 11월 국립무형유산원이 제작하고 초연하여 평단의 호평을 받은 공연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사기장’과 ‘매듭장’의 실제 작업을 공연화한 최초의 작품이다.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저서 「장인(The Craftsman)」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최고의 경지를 향해 정진하는 사람’을 뜻하는 ‘장인’을 중심에 두고 ‘흙’과 ‘실’이 우리 전통 공예인 ‘도자기’와 ‘매듭’으로 완성되는 인고의 과정을 총 2막의 무용극으로 구성했다.먼저, 제1막에는 국내 유일의 사기장 보유자인 김정옥(1942년생) 장인이 출연한다. 김정옥 보유자는 300년간 전통을 이어온 도자가문 ‘영남요’의 7대 명장으로, 아들 김경식(국가무형문화재 사기장 전승교육사), 손자 김지훈(국가무형문화재 사기장 이수자)과 함께 출연해 흙을 밟고, 물레를 돌려 찻사발을 빚어내는 작업을 그린다.제2막에는 50여 년 동안 기술을 닦은 매듭장 보유자 김혜순(1944년생) 장인이 무대에 올라 실을 감고, 끈을 맺고 풀며 매듭으로 엮어 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김혜순 보유자는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방송인 유재석 씨가 연기한 가상의 인물인 ‘유야호’의 머리 매듭을 만들었으며, 각종 강좌와 전시, 유물복원 등을 통해 매듭의 실용성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기여했다.이번 공연은 김희정 상명대 교수가 대본과 연출을, 박동우 홍익대 교수가 무대미술을, 정순도 상명대 교수가 음악을 맡았다. 특히 실제 공예 현장의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활용하고, 무대는 ‘흙, 물과 불’, ‘선과 면’을 주제로 도자기와 매듭의 탄생 과정을 현대적으로 시각화하는 등 관람객이 무형문화유산을 색다르게 체험할 수 있도록 연출하였다.국립국악원과 공동주최로 진행되는 서울 공연은 전석 무료이며, 5월 23일오후 2시부터 국립국악원 누리집에서 선착순 사전예약(1인당 2매) 후 관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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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통과 현대를 잇는 무용가 채상묵의 춤 인생인간적인 무용가, 채상묵을 만나다전통춤의 전승자로, 한국 춤의 창작자로 반세기가 넘는 채상묵의 춤 인생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한국 남성 춤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무용가 채상묵이 올해로 춤 인생 52년을 맞는다. 2009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공연된 〈채상묵 춤 50년의 향〉은 그가 걸어온 춤 여정 반세기를 주제로 한 창작 무용극이었다. 총 8편의 연작시가 ‘춤’ 하나에 일생을 걸어온 예인의 뜨거운 예술혼과 거기에 담긴 정수를 짧은 공연 시간 안에 표현해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는 당대 가장 뛰어난 남성 춤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춤에 대한 열정으로 아버지의 반대를 이겨냈던 어린 시절부터, 더 새롭고 다양한 배움을 얻고자 다른 스승의 문하로 들어가면서 홀로 감내해내야 했던 고통에 이르기까지……. 각종 무용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예인으로 평가받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인내의 시간이 따랐다. 그는 이매방류의 ‘승무’와 ‘살풀이’를 제대로 출 줄 아는 몇 안 되는 무용가인 동시에, 새로운 춤 세계를 개척하는 창작자이기도 했다. 주로 자신의 삶 이야기를 작품에 투영시키는 것이 채상묵 창작품의 특징인데, 인간적인 면모가 한껏 발휘된 그의 작품을 보노라면 특별히 화려한 효과가 없더라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이 그대로 느껴진다. 작은 체구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인함, 한순간에 관객을 집중시키는 춤 연기성, 손끝까지 섬세하고 정교한 춤 모양새, 소도구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창작 춤꾼, 자신의 삶과 인간적인 면을 작품에 투영시키는 힘. 모두 무용가 채상묵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책은 그가 공연해왔던 작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며, 채상묵의 삶과 춤꾼으로서 살아온 인생을 진솔하게 담았다. 특히 지루한 나열식 구성을 피하고 저자 이지은과 무용가 채상묵이 오랜 시간 인터뷰한 내용을 마치 현장을 직접 보는 듯한 대담식 구성으로 정리함으로써, 독자들이 그를 더욱 가깝게 느끼고 우리 춤에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하였다. 8년에 걸친 긴 준비기간을 거치며 채상묵의 춤 인생 조각들이 한층 더 단단하게 모여들었다. ‘오늘의 한국무용은 유구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철저히 고증된 그 바탕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태어나되 우리의 정서가 보여져야 한다.’라는 그의 말처럼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채상묵의 춤과 우리 시대 한국 춤의 발전상을 알고 관심을 가질 수 있길 기대한다. 이순을 넘어선 나이는 그에게 있어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 채상묵의 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춤의 맥을 잇는다'시리즈의 첫 번째 인물 『아름다운 반세기, 무용가 채상묵』은 저자 이지은이 한국 무용의 전승자이자 창작자로서 우리 춤의 근대사와 맥락을 같이 하는 무용가 채상묵과 오랜 시간 인터뷰를 하며 그의 춤 인생을 구술채록하여 엮었다. 무용가 채상묵의 50년 춤 여정을 대담형식으로 자연스레 풀어감으로써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했다. 평생을 춤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온 그가 직접 들려주는 진솔한 삶이야기와 더불어, 각 장마다 해당 공연 사진과 작품 설명, 관련 비평을 함께 실어 책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남성 무용의 불모지를 개척하며, 전통춤의 계승뿐만 아니라 춤에 대한 강한 창작욕으로 불타오르는 한 무용가의 춤 사랑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채상묵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90 현대춤 작가전]에서 그가 발표한 작품 하나가 생각났다. 〈마른 풀꽃의 소리〉라는 작품이다. 그 안에서 말하는 것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도 들리고 채상묵 선생의 인생철학처럼도 들리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시련 없는 삶이 어디 있으며 고난을 겪지 않는 인생은 또 어디 있으랴. 그러나 진정 예인의 삶이란 이 시련과 고난, 그리고 끊임없는 담금질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나는 이렇듯 예인 채상묵이 춤과 함께 들려주는 이 ‘마른 풀꽃의 소리’가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았다. --- p.114채상묵: 시간이 흐를수록 어렵게만 느껴져 왔던 전통춤의 사위마다 뼈를 깎는 고뇌를 담아 나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그런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과거와 어우러지며 미래를 향한 자리매김을 하는 셈이지요. 개인적으로 그 공연은 다시 한 번 예술혼에 정열을 쏟을 수 있는 성숙의 계기가 되어주었던 것 같아요.--- p.223 저자 이지은은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 중인 그는 특히 우리의 전통문화와 관련한 공연작품들을 다수 작업해 왔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국립국악원 국가브랜드공연 〈소리극 황진이〉와 경기도립무용단의 창작무용극 〈태권무무달하〉, 〈황진이〉, 〈도미부인〉 등이 있으며, 서울시립무용단의 창작무용극 〈연리근〉, 〈채상묵 춤 50년의 향〉, 〈누가 아름다운 학의 눈물을 보았는가〉 등의 무용대본을 집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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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 221세기 밀레니엄시대(2000년)를 맞이한 김덕명(1924~2015)옹은 어느덧 고희(古稀)도 훨씬 지난 76세였지만 노년기의 공연활동과 지역민속발굴과 지도에는 장년 못지않게 원숙함과 열정이 넘쳐있었다. 2000년 4월19일 <국립극장 50주년 국립무용단 제79회 정기공연> 양산학춤 특별초청공연으로 영남춤 명인 ‘서울 나들이’에 초청되어 갈채를 받았다. 한국경제신문(4.12) 예고기사와 국제신문 디지털뉴스부(4.19)에 네 사람이 펼치는 네 가지 색깔의 춤판에 대한 소개에서 "소리는 호남, 춤은 영남이라는 말은 예로부터 풍류의 정설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영남춤이 한국춤의 주류에서 밀려난 것은 사실이다. 춤이 중앙집중 되었고, 무형문화재 지정과정에서 호남쪽 춤이 주요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4人4色 나흘간의 춤 이야기'를 통해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영남춤이 처음으로 서울의 국립극장 무대에 선다. 이번 공연의 4색이 영남춤판의 주인공은 영남춤의 명인들인 김덕명, 김온경, 이윤석, 하용부이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씨는 양산 사찰학춤을 들고 나온다. 외로이 양산학춤을 지켜온 김씨는 이번 무대에서 이 춤의 원형을 선보였다”라고 알렸다. 이어서 5월 16·17일 호암아트홀무대에 오르게 되자 각종 매스콤에 대서특필하였다. 서울신문(5.2)기사 ‘인간문화재 3人의 전통춤 진수’와 조선일보(5.11) ‘인간문화재 한 무대에’ 기사에는 ‘사상 유례 없을 대원로들의 합동공연이 마련된 무대는 오는 16·17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리는 <제18회 명무명인전>, 세 노옹은 첫날 잇따라 무대에 선다’라고 하였고,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보유자인 김덕명옹은 ‘양산사찰학춤’을 춘다. 신라 선덕여왕때 창건된 통도사에서 대대로 계승되었다는 이 춤은 지난 87년 일본 NHK의 세계춤 종합평가에서 ‘춤의 황제’라는 극찬을 들었다"라고 알렸다. 2002년 9월 6~7일, 공연기획사 이일공과 호암아트홀이 주최하고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 세계민족무용연구소가 후원하는 행사로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공연이 있었는데, 각종 매스콤에 예고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덩실 덩실 얼쑤! 8인 男舞 한마당,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남자들이 추는 정통 민속춤이 한자리에 모인다. 남무(男舞)부재 현상 속에 민속무용은 그나마 궁중무용에 비하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해 왔다는 점에서 더욱 화제다. 특히 문장원·황재기·김덕명은 80대로 민속춤의 산증인이다’ , ‘<남무(男舞), 춤추는 처용 아비들>에서 멋과 흥으로 대변되던 우리 춤의 진수를 선보인다.’라고 했으며, ‘양산사찰학춤의 김덕명(80)은 일본 기생의 잉어춤 등에 능하고 학춤은 국내 최고라는 평이다. 학이 땅에 내려앉아 먹이를 먹고 암놈을 희롱하는 행동을 표현한 춤으로 도포와 갓을 쓰고 춘다.’(서울신문, 8. 29) 그밖에도 연합뉴스(8.29), 한국경제(8,29), 현대불교(8.20), 조선일보(9.5) 등에 예고기사로 크게 보도되었다. 춤판에서 남자춤꾼들의 모습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전통무용은 현대무용이나 발레에 비해 '남무부재 현상'이 더욱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춤에 한 평생을 걸어온 8명의 남성춤꾼들이 모처럼 한데 모여 신명나는 놀이판을 벌인다. 오는 9월6일, 7일 이틀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펼쳐지는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이 화제의 공연이다. 무대에 오르는 8명의 춤꾼중 셋은 이미 80대의 고령으로 이번이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리만 만들어지면 어디에서든 어깨를 들썩이며 일품 춤사위를 뽑아내는 '끼'와 '열정'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옹(80)은 고고한 학의 자태를 빼어나게 형상화한 양산학춤을 선사한다. 훨훨 날다가 내려앉아 두루두루 살피고 먹이를 휙 낚아채는 학의 모습을 선비의 차림으로 유장하게 표현해 낸다.’(한국경제, 8.29) ‘제도권 무계의 변방에 머물러 있는 다양한 한국 전통춤을 만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다. 농악판, 탈춤판, 사랑방 등 선조들의 삶 주변에서 흥겨운 '놀이'로 추었던 춤의 원형질을 맛볼 수 있는 자리다. 아울러 호방한 남성춤을 만나기 어려운 무용계 현실에 비춰볼 때도 분명 이색적인 무대다.(현대불교, 8.29) ‘공연 제목은 설화 속 춤꾼 '처용'에서 따왔다. 출연자들은 공연장이나 학교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전통춤을 지켜온 명인들이다. '무용가'로 불린 적이 없지만 자신의 춤세계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남다른 사람들로, 생활터전의 주변에서 명맥을 이어온 춤의 자유로운 멋과 흥을 느낄 수 있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인 김덕명(80)씨가 선보이는 양산사찰학춤은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돼 왔다는 학춤이다. 선비의 평상복인 도포에 갓을 쓴 채로 먹이를 살피다 휙 낚아채는 학을 재현한다. 김씨는 한량을 넘어선 직업 춤꾼으로 양반춤. 지성승무. 한량무. 나례무 등 다양한 춤사위를 보유하고 있다.(연합뉴스, 5.29) ‘무대에 오르는 춤을 보자. 승무, 살풀이, 태평무 등에 비해서는 대접이 형편없는 춤들이다. 그러나 명인들은 이에 연연하지 않고 너울너울 춤추며 한 세상을 보내고 있다. 당대 최고 즉흥춤이라는 문장원의 동래입춤, 맵시있는 자태가 빛나는 황재기의 고깔 소고춤, 한 마리 고고한 학을 연상시키는 김덕명의 양산 사찰학춤, 다양한 디딤의 묘미가 살아있는 정인삼의 진쇠춤, 굵고 시원한 마당춤…. 김덕명(78)옹은 어릴 적 부모가 보낸 절에서 도망쳐 나와 농악패를 따라 나섰다가 춤과 인연을 맺었다.’(조선일보, 9. 5) 2003년 11월 22일에는 <팔십인생의 춤> 학산 김덕명 80인생 정통고전춤 발표회(양산)가 양산문예회관에서 있었다. ‘양산문화원이 주최하고 양산학춤보존회가 주관하는 이번 공연에서는 통도사의 학춤, 승무, 바라춤과 전통 고전춤을 습득하여 올바르게 전승하고 한량무를 발굴하여 경남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학산의 열정과 그 공을 기리기 위한 무대로 그 문화생들이 자리를 마련했다. 순수 정통 학산 김덕명류의 팔십 인생의 춤이 선보이는 이번 무대에는 ‘지성승무’와 ‘양산학춤’, ‘한량무 극무’등 주위에서 쉽게 감상하기 힘든 10개의 작품이 공연되며 학산 김덕명도 직접 무대에 선다. 학산 김덕명은 양산시 동면출신으로 양산학춤을 오늘의 수준으로 이끌어 올린 장본인이며 불교 중앙문화예술원 원장과 김해시립전통무용단 단장, 국악협회 경남도지부장 등을 역임하며 다양한 춤사위를 선보여 왔는가 하면 후진양성에도 평생을 몸 바쳐 온 예인이다.(경남일보, 11.21) '지난 94년부터 양산학춤과 연등바라춤을 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양산시와 경남도에 여러번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거절당했다'며 '내가 죽기 전에 학춤과 연등바라춤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을 꼭 보고싶다'고 말했다. 또 '전국에 걸쳐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내가(김옹) 가진 28가지의 춤을 표현하는 제자는 아직 없어 죽기 전에 다 전수할 수 있을지 항상 불안하다'고 걱정한다.‘ (부산일보, 11.28) ‘양산문화원이 주최하고 양산학춤보존회가 주관한 이번 공연은 통도사의 학춤, 승무, 바라춤과 전통 고전춤을 전승하고 한량무를 발굴하여 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학산의 열정과 그 공을 기리기 위해 문하생들이 마련했다. 이번 무대에는 '지성승무'와 '양산학춤', '한량무 극무'등 주위에서 쉽게 감상하기 힘든 10개의 작품이 공연되며 학산 김덕명 선생도 직접 무대에 올랐다. 불교 중앙문화예술원 원장과 김해시립전통무용단 단장, 국악협회경남도지부장 등을 역임한 학산 김덕명 선생은 양산사찰학춤, 연등바라춤, 지성승무 등의 맥을 잇기 위한 노력으로 문화재 지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후진양성에 매진하고 있다.(현대불교, 12.1) 2005년 제8회 세계무용축제에서 다시 <전무후무(全舞珝舞)> 국보급 춤의 명인 6명이 무대에 올렸을 때에도 김덕명은 빠지지 않고 양산학춤을 추었다. ‘<전무후무(全舞珝舞, 珝는 옥이름 후)>. 춤의 명인 6명이 한 무대에 오른다. 강선영의 태평무, 김덕명의 양산학춤, 김수악의 교방굿거리춤, 문장원의 입춤, 이매방의 승무, 장금도의 민살풀이춤. 가장 젊은 장금도(77)부터 최고령 문장원(88)까지, 이들의 평균 연령은 82세다. 김덕명 양산학춤은 너울너울 학을 닮아가는 한량을 그린다.’(조선일보, 9.22) ‘김덕명의 인터뷰 중 "학춤 출 땐 정신부터 학이 돼요. 요즘 춤추는 사람들은 장식에 치중하느라 뿌리를 놓치는 것 같아. 우리끼리야 누가 잘 하나 따져 뭘 해. 다들 춤에 미쳤지. 그렇지 않고서야 80 넘어 90이 다 될 때까지 고생고생 하며 춤출 수 있나. 앞으로 열흘 몸 건사 잘 해서 무대에서 구부러지지만 마시소들!(웃음)”(조선일보, 9.28) ‘걷는 것은 두려우나 춤은 두렵지 않다…. 지난 8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오늘 하루를 위해서 일생을 장만해온 것처럼, 몸이 아니라 춤만 남았다….” 어느 이의 말처럼 전무후무한 공연이었다. 젊은날의 그것만 했으련만, 80년 묵은 육신에서 곰삭은 춤 맛은 감히 평할 것이 아니었다. 이날 노무현 대통령 내외 관람하면서 "아주 신명이 났다”며 관람 소감을 밝혔다.’(경향신문, 10.10)(양산신문, 10, 5) 2008년 12월 5일 영남명무전 <무림평전(舞林平定)>이 통영시민회관 대극장에 있었다. 경남도의 전통 춤판을 지켜가는 남성 5인방이 한자리에 모인다. 김덕명, 이윤석, 하용부, 김선옥, 김홍종 선생이 영남명무전 ‘무림평정’(舞林評定)으로 다음달 5일 통영시민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경남도 전통춤계의 큰 어른들인 다섯 선생은 전국전통예술계에서도 반열에 올라있는 춤꾼들이자 광대들이다. 이들 다섯 춤꾼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지난달 람사르 총회 기념 인간문화재 명무전에서 한 무대 오른 후 이번에 통영을 찾게 됐다. 우리나라 대표 춤꾼이자 큰 선생인 김덕명 선생은 이번 공연에서 조선시대 양반들의 곧음과 부드러움, 세심함과 단아함을 표현하는 호걸 양반춤으로 통영시민들과 만난다.<경남매일, 11월 24일> 호걸양반춤의 김덕명, 채상소고춤의 김선옥, 통영문둥북춤의 김홍종, 덧뵈기춤의 이윤석, 밀양북춤의 하용부. 경남 전통 춤판을 굳건히 지켜가고 있는 명인들의 춤사위가 통영에서 펼쳐진다. 하지만 이번 공연제목 ‘무림평정(舞林評定)’에는 다른 깊은 속뜻이 있다고 한다. 연출을 맡은 김홍종 선생은 "춤판을 평정한다는 제 잘난 멋의 과시가 아니라, 한 가지 분야에서 올곧게 정도를 지키며 살다보면 누구나 존경을 받아야 하는 세상의 이치를 춤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 속에는 김덕명 선생과 같은 선배를 아울러 모시고 싶은 후배의 마음도 함께 들어 있다고 한다.<양산신문, 12. 21> 구순의 나이에도 정정한 목소리와 자태는 제자들을 사로잡았다. 학산 선생은 공연이 아닌 발표회라는 것도 강조했다. "공연은 돈 받고 보여주는 거야. 발표회는 연습 결과를 보여주고, 관객들이 춤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거지." 양산학춤보존회는 구시대, 장악원 등 전문 예술인에 의해 생성돼, 1930년대에 평양 명기 김농주에 의해 양산권번에 정착됐다. 학산 선생에 의해 이어지고 있는 호걸양반춤의 호탕하고 의기 넘치는 춤도 선보였다. 구운몽을 바탕으로 만든 무언 무용극인 한량무의 해학은 웃음 을 연발하게 했다.<양산신문, 12.4> 2014년 3월20일 진주전통예술회관에서 학산 김덕명선생의 제2회 한량무발표회를 가졌다.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한량무’ 공연은 학산 김덕명선생의 가르침으로 우리나라에 하니밖에 없는 일곱배역이 있는 극으로 된 무용이다. 한량, 색시, 상좌, 주모, 승려, 별감, 마당쇠로 총 9마당으로 구성돼 있다.<진주인터넷신문, 2014. 3.20> 이상에 소개한 신문기사 외에도 많은 공연활동과 전수활동이 있었으나 지면관계로 다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구십대에 이르기까지 중앙무대와 향토무대를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무대를 장식하며 남성다운 춤, 영남덧뵈기춤, 사찰계춤의 진수를 보여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김덕명은 양산 통도사와 양산 권번에서 전승된 독특한 춤사위를 지닌 독보적인 춤꾼이다. 그런데 양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보류된 안타까움 속에 있을 때 진주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가 진주와 연을 맺게 된 것은 마지막 기녀출신들의 노력으로부터였다. 당시 김덕명은 그가 소원하던 학춤이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에서 보류된 후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이었을 때 연로한 진주의 보유자들이 김덕명을 찾아 지속적인 부탁을 했고 또한 진주는 전국 제일의 종합예술행사인 개천예술제가 개최되는 예향이라는 것과 그의 학춤발굴자였던 서국영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이다. 진주의 예술이 기녀들에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교방이 해체된 후 1913년 기녀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아서 진주기생조합을 결성하였다. 이어 1928년 4월, 김창윤에 의해 진주권번이 운영되었으나 부실하였다가 1938년‘최치환’에 의해 진주예기권번이 창립되었다. 진주권번의 춤 선생인 최완자(崔完子)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주로 감영에 선발되어 궁중연희에 참가했다. 그녀의 제자 김수악(金壽岳), 강귀례(姜貴禮), 강순금(姜順今)등이 1967년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의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김덕명을 모셔와 1976년부터 예향 진주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1979년 5월2일자로 경남무형문화재 제3호로 한량무가 지정되면서 보유자 김덕명 외 7명으로 등재되었다. 김덕명의 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뜻 깊고 빛나는 업적은 진주와 양산(梁山)지역에서 무형문화재를 전승시켰으며, 민속놀이 발굴과 전승에도 큰 공로를 김해지역에서 문화예술의 밑거름으로 남긴 가락오광대와 석전놀이, 김해농요 등을 발굴 전수시킨 흔적을 볼 때 그를 다재다능한 예술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1990년 후반, 양산시 덕계리에서 망시곱배기놀이 발굴하여 경남무형문화재 제23호 웅상장원놀이로 지정되는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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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춤'과 '화관무' 창시자 김백봉'부채춤'과 '화관무' 창시자로 한국 무용계를 이끌었던 김백봉 원로 무용가가 97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한 평생 춤과 함께 해온 고인은 근·현대 한국무용 역사의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인은 '화관무', '부채춤', '산조', 만다라', 무용극 '심청', '춘향전' 등 평생 600여 편이 넘는 창작춤을 만들며 한국 신무용의 형태와 기틀을 다졌다.1927년 평양에서 출생한 고인은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이자 동서였다. 고인은 13세 때 아버지 손을 잡고 최승희의 공연을 본 후 감동해 최승희의 제자 되기를 간청했다. 14살에 홀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최승희무용연구소’ 문하생이 된 그는 1942년 도쿄에서 첫 공연을 했다. 해방 후 최승희와 함께 고향인 북으로 가 평양에 정착, 최승희무용단 제1무용수 겸 상임안무가로 활동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남편과 함께 월남한 뒤 1953년 서울에 '김백봉무용연구소'를 설립했다. 남편 안제승(1922~1998)은 최승희 남편의 동생이다. 이후 고인은 1954년 신무용 계열의 창작춤인 부채춤을 처음 발표했으며,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부채춤을 처음으로 선보여 전 세계에 한국 춤의 미를 알렸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는 2000명의 무용수가 참여한 대형 군무 ‘화관무’를 선보이기도 했다. 고인은 1965년부터 1992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경희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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